by Jayz
"여기가 양조장이라고?"
"어디?"
"뒤로 back해봐. 이거 벗겨진 간판 같은데?"
초행길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입구에 세월이 벗겨낸 철제 간판이 있었다.
우리는 그 철제 간판을 단서로 자동차를 후진했고 창문 넘어로 막걸리 익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제서야 그곳이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임을 알아차렸다.
양조계의 다섯 별이 뭉쳐 탄생한 곳
경기도 이천에는 다섯 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한흥양조장, 대월양조장, 부발양조장, 장호원양조장, 오천양조장.
각 양조장들은 오랜 세월 저마다의 동네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막걸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약 25년 전, 막걸리 판매 부진이 거듭되자 흩어져 있던 힘을 한 데 모아 새롭게 시작해보자며 양조장을 하나로 통합했다. 마치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세상의 모든 원기를 모아 구슬을 만드는 것처럼.
이렇게 이천 양조계의 다섯 별이 뭉쳐 오성양조장이 탄생했다. 오성양조장은 옛 대월양조장의 시설을 이어받아 막걸리를 빚고 있다.
이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곳으로 건물 곳곳엔 그동안의 세월이 서려있다. 특히 양조장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이천 쌀 논이 펼쳐져 있다. 이천 쌀로 만든 막걸리. 이 말만 들어도 웅장해지지 않는가. 이천 시내 막걸리 판매량 1위 답다.
무엇이든 술로 빚어버리는, 연금술사
현재 오성양조장은 단 두 명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공장장과 직원. 공장장은 58년생 이천 태생이다. 위 다섯 개의 양조장 중 하나를 가업으로 이어받아 18살부터 막걸리를 빚어왔다고 한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현재는 공장장의 신분이지만 누구보다 술 빚기에 진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재료로도 술을 빚어봤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붕어나 한약재를 넣은 술. "전분과 당분만 있다면 전부 술로 바꿀 수 있어요." 심지어 한국술에서 중요한 '국'을 쌀과 밀을 사용해 직접 제조하기까지. 이런 열정 때문일까. 과거 막걸리를 일본에 전파하겠다고 오사카로 혈혈단신 날아갔다. 그곳에서 제일교포 2세와 대의를 도모했지만 아름답게 마무리 짓진 못했다고 한다. 그의 양조인생이 탄탄대로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버티는 맷집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이천생쌀막걸리와 오성약주
오성양조장은 크게 막걸리와 약주를 제조한다. 막걸리부터 얘기하자면 놀랍게도 오래된 양조장 치고 아스파탐을 넣지 않는다. 18%의 도수 원주에 물을 희석해 6% 도수를 맞추고 일주일간 숙성한다. 공장장은 막걸리를 마실 때 향취를 강조한다. 이천쌀로 막걸리를 빚으면 사과향이 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이를 잘 만든 막걸리라 평한다. 반면 수입쌀로 막걸리를 빚으면 퀘퀘한 향이 난다고. 이천은 예로부터 물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인근 부발읍에 OB맥주 공장을 비롯해 술공장들이 위치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 이들은 충주댐 물을 사용하지만 오성양조장은 동네에서 나는 200m 깊이의 지하 암반수를 사용한다고 한다. 콸콸콸 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을 맛보면 깨끗하고 청량한 기분이 든다. 오성양조장의 술맛엔 이 물이 큰 역할을 차지하는 만큼 동네행사에 막걸리 서비스를 팍팍 하는 편이라는 후문. 이따금씩 찹쌀을 원료로 막걸리를 빚는다. 하지만 고두밥을 쪘을 때 끈적거리기에 공정이 여간 쉽지 않다고. 그래서 찹쌀 막걸리는 지인들에게 특별히(?) 선물해준다고 한다. 오성약주는 알코올 도수 11%로 열흘을 숙성한 술이다. 약주는 후술을 더 많이 하는데, 여과와 침전이 쉽고 알코올이 많이 나오는 방법이다. 오성약주도 이천쌀을 사용해서 그런지 잘 익은 사과향취가 은은하게 풍긴다. 하지만 약주를 만나는 시기는 명절 시기에만 가능하다. 이외에도 이천의 축제철에 복숭아와 산수유를 넣은 술을 소량 생산해 축제장에서만 판매한다.
앞으로 기억에서만 존재할 술
2023년 기준 오성양조장은 하루 막걸리 100박스 이하로 출고된다. 한 박스에 20병이니 하루 2000병이 출고되는 셈이다. 코로나 이전 하루 200~300박스 출고되던 시절과 비교하면 출고량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장장은 맥주를 혼자 마시는 술이라고 치면 막걸리는 함께 마시는 술인데, 코로나가 확산되며 사람이 모이지 못하니 막걸리에 대한 수요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번 막걸리를 안 찾기 시작하니 그게 일상이 돼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그래서 지금은 성장을 바라보기 보다는 버티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오성양조장을 이끄는 구성원도 단 둘. 공장장의 은퇴가 다가오며 오성양조장의 역사도 끝날 시간이 머지 않았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 뿐이어다. 한편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만을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만간 이천 시내 1위인 이천생쌀막걸리가 가득찬 동네 식당의 냉장고가 서울의 대기업 막걸리로 대체되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조장 내부를 둘러보다가 낯선 이름이 적힌 막걸리병들을 발견했다.
"여주 막걸리가 왜 여기 있어요?"
"아, 그거 저희가 OEM으로 생산하고 있어요"
"여주양조장이 폐업하고 여주의 향토 막걸리가 사라지자 이를 향수하는 바라는 사람들이 이름만이라도...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 있어요"
'이천 유일 양조장인 오성양조장이 사라지면 인근 어떤 양조장에서 이천생쌀막걸리의 이름만 이어받아 OEM하는 곳이 존재할 수도 있겠네'
먹먹한 마음을 안은 채 서울행 차에 몸을 실었다.
10월, 얼마 남지 않는 오성양조장의 이천생쌀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면 짐빠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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