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imbba Ko
한파주의보가 울리는 아침.
전날까지도 가게일을 보느라 늦은 귀가를 했었다. 짐빠데이거나 말거나 모르쇠하고 안전한 이불속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지역 술을 찾아가지 않으면 짐빠는 더이상 짐빠가 아니기에 차가운 공기로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걸어가는 중 집합 장소 까지 태워갈 수 있다는 M의 전화가 왔다. 도대체 M은.. 집도 멀고 어제 같이 늦게 집에 갔는데.. 벌써 거의 다 왔다니.. 게으름 피운 스스로를 반성하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짐빠의 견습생 삼공이와 함께 M의 차를 타고 팀원들을 하나씩 만났다. 여행길에 커피와 김밥이 빠지면 섭하지. C가 추천한 김밥집에 들어서니 5명의 직원이 분주히 김밥을 말고 있더라. 이들의 부지런함과 열기에 감탄하며 당진으로 출발했다.
당진에 가는 동안 제비꽃색 하늘은 점점 청청색으로 바뀌었고, 도시에서 산으로 공장으로 바다로 창밖의 풍경은 장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을 시점, C가 모두를 위해 오늘 방문하는 양조장에 대해 사전 조사한 내용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사실 모두 읽고 왔어야 하는 내용이었으나 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충청남도 당진시.
C가 읽어준 내용 속에서 각 양조장들은 전설 속 이야기 같은 업적을 가진 곳들이었다. 다 사실일까? 궁금해졌다. 어떤 분이실지, 어떤 모습일지. 차의 속도가 줄었다. 창밖의 산은 완만한 산들로 바뀌어 있었다. 얕은 구름이 산 위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붉은 색으로 단청이 되어 있는 2층 누각을 지나니 산에 둘러쌓인 작은 분지에 들어섰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지만 기와지붕을 가진 현대식으로 개량된된 한옥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면천샘물 양조장에 도착했다.
면천샘물 양조장.
'두견주'를 만들었던 양조장에 문을 닫고 '면천샘물'이라는 새로운 양조장이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용도는 변하지 않은 양조장을 보고 있자니,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목조 건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때도 혹 술에 관련된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포근한 지형에 넓은 뜰을 바라보고 있는 양조장은 분명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양조장은 철저한 위생이 중요한 곳으로 견습생 삼공이가 출입할 수 없다. 우리가 양조장을 둘러 보는 동안 차에서 기다려 줘야 할터, 삼공이를 환기시켜준다는 핑계로 양조장 주변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아늑한 산이 둘러싸고, 앞엔 유적지로 보이는 뜰이 펼쳐져 있고 산이 살짝 열려 길이 나있었다. 포근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뒤늦게 사무실에 들어사니 본부장님과 짐빠 식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소 PD수첩 취조 분위기 같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6개와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저 눈망울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떨리는 눈망울 두개가 있었다. 떨리는 눈망울의 주인공은 본부장님이셨다. 방문을 요청드렸을때 부터 양조장 안내까지 우리에게 길라잡이가 되어주신 분이었다.
본부장님께 지역 주민으로 지내시다다 양조장이 만들어지면서 취업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오랜 시간 양조장과 함께 하셨다. 본부장님께서 일하시는 동안 면천샘물에서 만든 생막거리는 당진 일대에 제일가는 1등 막걸리가 되었다고 한다. 양조장이 걸어온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던 중 본부장님께서 양조 과정을 보여주시겠다며 덧신을 가져다 주셨다. 하늘색 덧신을 신고 공장 안으로 향했다.
술이 익는 향이 가득 했다. 고소한 막걸리 향에 군침이 돌았다. 입국을 발효시키는 과정부터 병입하는 과정까지 구석구석 보여주셨다. 입국맛은 시큼 새콤하였다. 누룩 향을 맡아본 적은 있었지만, 입국을 먹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해주셨지만 공개는 하지 말아달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찍은 사진들은 개인 소장. 궁금한 분들은 DM 주시면 살짝 보여드리겠다.
병입하고 출하하는 곳에 보니 노란 막걸리 박스가 벽처럼 쌓여 있었다. (주)면천주조와 (주)하나주조 막걸리박스가 섞여서 쌓여 있었다. 두견주를 만들었던 하나주조의 시설을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거대한 세탁기 같은 기계장치가 마당 한켠에 놓여 있었다. 코로나 전엔 동네 분들이 오셔서 출하되고 남은 막걸리를 말통에 담아 가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있었던 장치라고 한다. 일반 음식점에선 육수를 담아 놓는 기계라고 한다. 우리도 말통에 담겨 있던 막걸리를 한잔씩 따라 주셨다. 크 이맛이지.
때마침 도착하신 공장장님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변비에 직방이라며 본부장님께서는 서울에서 온 8개의 눈망울을 위해 막걸리를 챙겨주셨다. 이것이 술쟁이들 사이의 정이란 말인가. 감동을 머금고 근처 맛집을 여쭈니 딸부자집을 추천해 주시더라. 그곳에도 면천생막걸리가 있는 거래처라며 시원한 국물을 마실 수 있다고 추천해 주셨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순성 브루어리'에 가서 수제맥주와 고기를 먹을 마음을 먹고 있기에 지역술의 성지 하나로마트를 들려 순성브루어리로 향했다.
하나로 마트 앞에 들어서니 귀여운 댕댕이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른 개들에게 냉정한 삼공이도 아기 강아지들을 보면 이쁘게 바라본다. 이쁜 강아지 네 마리와 폴짝 거리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순성브루어리.
“미술전공하셨어요?ㅎㅎ”
순성브루어리 사모님이 갑작스럽게 관심을 가지셨다. 사장님 내외는 서울 서초구에 집이 있으시다고 한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는데 한명은 미술을 전공하고 있고, 한명은 아빠를 닮아 IT 업계 종사 중이라고 하셨다.
순성브루어리는 IT업계에서 일하셨던 대표님께서 고향으로 내려와 만든 양조장이었다. 사모님께서는 건축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업계에서 일해오셨기에 남편의 양조장을 설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공간 곳곳이 사람들이 와서 모이고, 쉬고, 술을 만드는 환경을 볼 수 있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지방에 하나 둘 보였던 익숙한 수련관 같은 시설들이 독립된 동으로 가운데 잔디밭을 중심으로 서 있었다. 그중에 한개는 막걸리 양조장, 한개는 맥주 양조장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맥주 양조장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을 돌아보니 하나로마트에서 샀던 술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심지어 가격은 더 저려엄… 사장님께서 인자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여기가 더 싸요^^”를 시전해주셨다.
2층에 올라서니 한 쪽엔 전면이 유리인 벽이 있었다. 그 아래로 거대한 맥주 양조장이 내려다 보였다. 술을 빚는 양조장도 내려다 보이고 하니, 모든 맥주를 다 먹어봐야겠지? 하는 맘으로 샘플러를 주문했다. 6잔이 나왔다. 사람은 4명. 잔은 6잔. 한번씩 맛을 보고 원하는 술을 저마다 가져가 마셨다.
‘띵동’,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뜰어서 구워진 바베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우리 상에 놓여졌다. “모닝빵 위에 돼지고기 2점, 소스 위에 샐러드~”를 맘으로 흥얼거리며.
주린 배를 채우니 창밖에 아미산의 능선이 보였다. 산 사이에 마을 사이에 읍성이 오랜 시간 이땅에 살아왔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보게 하였다.
어쩐지 세련된 레이블은 누가 디자인 했는지 여쭈니, 역시 숨고가 짱이었다. 실력자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세상에서 레이블 디자인 해줄 사람을 찾으셨고 오늘의 디자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제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려 하니 사모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서울에서 온것이, 술 관련된 일을 한것이, 미술을 한 것이 반가우셨는지 사모님께서는 술을 챙겨주려 하셨다. 크… 이 정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차엔 공간이 부족했다. 사모님의 마음만 가득 담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이동중 동남아시아 식당이 다수 보였다. 지방을 중심으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였다. 한국의 문화가 더 입체적으로 바뀌는 경계의 어느 순간에 서있는 듯하다. 여러 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음식이 지역의 음식이 되고, 그들이 빚은 술이 지역의 술이 되는 어느 시작점 같더라. 언젠가 지역술을 찾아오면 베트남 전통주를 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성광주조.
미담막거리를 만드는 성광주조에 들어섰다. 미담이라니, 미담이 많을것 같은 이름…
빛이 바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몇년이나 해를 마주하고 있었을까. 성광주조는 면천주조보다 더 앝은 언덕 위에 들어서 있었다. 산이 시작되는 지점에 살짝 박혀 있듯이.
큰아들님이 맞이해 주셨다. 일정이 있으셔 동생분이 맞아주시기로 했었지만 마침 시간이 되셨다고 한다. 훤칠하셨다. 안경을 쓴 모습이 정확한 것을 좋아하실 것 같더라. 술을 만드실때도 칼같이 하시자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산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일까 시간이 정오를 지나서 일까 바람이 살짝더 찼다. 사무실에 들어섰다. 차가운 공기가 깔려 있었다. 공장에서 술을 빚고 납품하는 시간을 대부분 쓰시기에 사무실은 잘 활용하지 않으신다 하였다.
사무실 저편엔 싱크대와 술을 실험하셨을 여러 도구들이 보였다. 한쪽 벽엔 책장과 상을 받으시는 대표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따뜻한 차를 내어주시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장수막걸리가 협동조합형태이며 서울의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는데 그 맛이 양조장마다 다 다르다. 그중에서도 창동쪽 술이 제일 맛나다고 하였었다. 놀랍게도 당진 양조장에서 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창동 막걸리가 제일 맛있어졌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성광주조를 만드신 성기욱대표님은 동국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시고 서울탁주에 입사하게 되셨다고 한다. 당시 양조인들 중에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이 부재한 터라 서울탁주대표님이 동국대학교 교수님께 훌륭한 학생을 좀 추천해 달라고 요청한 덕분이었다. 성대표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막걸리병을 개발하고 특허내는 과정을 주도하셨다고 한다. 당시엔 흐물흐물한 병에 유통되었던 막걸리는 병 자체로 상품성이 없고 따르기에 어려워 유통에 문제가 많았었다고 한다. 때문에 술집들에서는 주전자 같은 별도의 통으로 술을 옮겨담아 손님들에게 따라주는 형식으로 판매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술에 물을 타기도 하고, 오염이 되어 맛이 변하기도 하는 등 여러 문제들이 많이 발생했었다. 술의 질을 균일하게 하고, 만들어 파는 만큼 수익으로 남기고 싶은 양조장과 술의 세금을 명확하게 거두고 싶어하는 정부의 이익이 맞아 병을 개발 할 수 있었다고 한다다.
막걸리는 발효되는 과정에서 기포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적당이 빼주지 않으면 병을 열때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지는 일이 발생했었다. 성대표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효과정 중에 발생하는 기포를 서서히 빼줄 수 있는 병뚜껑 또한 발명하셨다고 한다. 유통을 용이하게 만드는 병의 개발은 막걸리 수요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제 다음 과제는 술을 균일하게 만들어내는 일, 더 맛난 술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당시 창동 양조장에 근무하셨던 성대표님은 일본에서 입국만드는 기계를 들여오신다. 여러 테스트를 거쳐 한국의 환경에 최적화된 세팅하게 되시며, 소비자들을 수요를 늘릴 수 있었다고 한다.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창동 공장은 이후 여러대를 더 들여 왔는데, 공장 크기에 비해 기계가 너무 많아져 공장이 가득차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양질의 술을 균일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유통 과정중에 변질 없이 소비자에게 갈 수 있게 하였다. 막걸리 소비와 유통에 큰 영향을 주셨던 성대표님은 고향으로 내려와 자신의 양조장을 차리게 되신다.
두견주를 만들었던 공장이 비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주들을 모아 양조장을 만든다. 그 양조장이 바로 앞서 다녀온 ‘면천주조’였다. 면천생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만드신 이후 독립하시여 ‘성광주조’를 만들게 되셨다고 한다. 이후 아드님이 합류해 오늘의 성광주조를 이어가고 있다.
아드님 또한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시고 대기업에서 식품관련일을 하었다. 집안이 모두 식품에 관해서는 전문가이신걸 보니 참 가풍이라는것, 가업이라는 것이 이런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것일까 싶었다.
앞서 언급 했듯이 술이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주셨던 성광주조는 주류문화에 또 하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가양주 문화였다. 술이 만들어지고 판매되는 양을 계산해보니 입국을 만드는 양이 술을 만드는 양보다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양조장들과 가양주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입국을 판매하게 되었다고 한다. 술을 유통하는 것을 넘어 술을 빚는 문화에도 영향을 주고 계셨다. 한국 현대 양조문화에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공장을 구경시켜 주셨다. 입국이 만들어지는 기계 부터 병입하는 과정까지.
공장을 한바퀴 돌아 다시 정문 앞으로 왔다. 문 앞에는 탁주가격을 알려주는 가격표와 탁주가 들어있는 창고가 있었다. 새벽 4시부터 술을 빚고 오전 11시에 납품을 하고 공장에서의 하루 일과를 마친다고 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11시 이후에 오는 경우가 많으니 신뢰를 기반으로 각자 현금을 지불하고 술을 가져가는 형태였다.
창고 저 깊숙한 곳에 유리병을 발견했다. 궁금했다. 무엇인지. 아드님께서도 언제 저런걸 넣어놨지? 하면서 갸우뚱 하시더니 이내 기억이 나셨다. 약주의 유통기한을 보려고 테스트 차원에서 넣어놓았던 것이라 하셨다. 지금껏 탁주이야기만 나눴었는데 처음으로 보는 성광주조의 양주였다. 그간 약주와 소주 모든 것들을 다 연구 해놓고 계셨다. 주류시장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따라 적합한 술을 낼 준비를 이미 다 해놓으셨었다.
그간 해오신 업적과 한국술 시장에 주었던 영향들, 그리고 계속 연구해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 모습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였다. 마음엔 감동을, 차엔 술을 담아 마지막 목적지 신평양조장으로 향했다.
신평 양조장
신평 양조장은 손님을 맞이 하기 위해 잘 정돈된 곳이었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만들어진 양조장은 깊은 역사를 기억할 공간도 지키고 있었다. 옛 공간은 박물관과 상점으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박물관엔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술을 배달했던 짐빠를 사진으로도 볼 수 있었고, 신평양조장의 역사 뿐만 아니라 술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우리는 운 좋게 2대로 가업을 이어받으신 김용세 대표님도 직접 뵐 수 있었다. 궁금한 것들을 직접 여쭐 수 있었다. 근대 이후 한국술의 역사를 이야기 할때 빠지지 않는 것이 가양주의 소멸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입국으로 확일화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입국은 왜색으로 오염되게 한 소재라는 인식이 어느 한편에 있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자료가 있었다. 일본 역시도 산업화와 자본주의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입국을 통일하는 과정을 거쳤고, 쌀을 발효시켜 입국을 만드는 기술의 근간은 한반도의 주조기술이 근간이 되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문화는 한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류에 따라 서로 오가며 상호발전해나간다는 점을 술의 역사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신평양조장의 술은 지역사회에서도 중요한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양조장을 중심으로 한 교육과 체험, 관광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9년엔 청와대 만찬주로도 선정 되었다고 하니 오래된 역사와 현재 벌어지는 일들의 교차가 큰 문화자원을 만들어왔음을 느꼈다. 양조장이 많이 탄생하는 요즘, 어떤 술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지속될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1월의 짐빠데이를 마쳤다. 양조장 세 곳을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길고 피로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니 업어온 술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K는 내일 출근이었고, M은 모레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이었지만. 우리는 술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새벽 2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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